쌍용자동차 : 우리는 이긴다!

지지성명

 
작성일 : 09-07-18 01:12
[기고/조돈희]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글쓴이 : 공투본
조회 : 2,791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노동자 고공농성의 역사와 의미②] 82미터 골리앗


2009-07-13 15시07분 조돈희

대량의 정리해고에 맞서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이 40일을 넘겼습니다.
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70m 굴뚝에 올라 농성한지도 50일이 넘었습니다. “왜 노동자들은 굴뚝에 오르는 것일까요?” 굴뚝뿐 아니라 한강철교, 송전탑, 옥상, 골리앗 크레인까지 높은 곳이면 어디든 오르고 매달려야 하는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자 고공농성의 역사와 의미>는 참세상, 참소리, 울산노동뉴스, 미디어충청 공동기획입니다.[편집자 주]

벼락 천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고, 단전단수로 인한 암흑같은 상황에서도 마지막 보루로 굴뚝 고공농성장과 도장 공장을 지키고 있을 쌍용자동차 조합원 동지들과 20년 전 울산 현대중공업 공장점거 투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글을 쓴다.

이제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고 빛바랜 투쟁으로 기억되고 있는 20년 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금에 비하면 참으로 행복한 투쟁이었다.

1998년부터 형성된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저지, 생존권사수 투쟁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구체적인 현실이며, 그것은 20년 전 군사독재정권 시절 노동자들의 처지보다 더 열악하고 절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금처럼 ‘산자와 죽은자’로 나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하에 놓인 노동자들은 ‘산자와 죽은자’로 나뉘고 그들 간의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다. 10년 20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직장 동료들이 한순간 ‘산자와 죽은자’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존권사수’를 위해 서로 치고받고,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의 전장으로 내몰린다.

자본주의 하에서 그러한 모습은 노동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음은 용산철거민 투쟁을 통해서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2009년 1월20일 용산 망루 참사사건과 그들의 처절한 투쟁 대 2MB 자본가정권의 폭력과 쌩까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 대 자본가정권의 폭력과 쌩까기로 일관하는 상황.

지금 이 절박한 시기, 역사적 고공농성 기획시리즈 글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고공농성을 선택할 때 그 노동자들의 상태와 심정은 단 하나 ‘절박함’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독자로부터 지금 현재 ‘고공농성중인’ 노동자 민중들에게 연대의 손길이 뻗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990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990년 골리앗 위에 선 필자(오른쪽). 사진=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사회사진연구소 엮음 <답하라, 전세계 노동자>

1.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 노동자들의 거대했던 투쟁은 어용노조 타도와, 그동안 노동자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주노조를 가슴에 품으면서 마무리되었다.

민주노조로 조직된 울산 현대조선소 노동자들의 행보는 다음해인 1988년 초부터 뒤엉키기 시작했고,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일들(총선시 최초의 노동자 후보)이 있었으며, 자본과 정권의 노동자들에 대한 반격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87년 이후 소위 1988~89년 128파업투쟁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6000의 전사들이 흩어질 줄 모르고 자신의 공장을 철의 장막으로 만들었던 128일 파업투쟁!... 1990년 골리앗투쟁을 말하기 위해서는 128일 투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1988~1989년 128일 파업투쟁

128일 투쟁은 1987년 투쟁을 거치면서 구속, 해고된 동지들의 원직복직과 노동조건을 명시적으로 구체화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해야 하는 투쟁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연초 현중노조 3대 집행부(3대 집행부는 사실상 안정적 노조집행부로서 첫 집행부였다) 위원장으로 당선된 자는 당선이 발표된 당일날 ‘축하파티’를 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간 입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쩔 수 없이 첫 출발부터 직무대행체제에서 시작한 임단협에서는 그 불안한 시작이 예고했듯이 직무대행의 직권조인 사태가 벌어졌다.

직권조인은 조합원들로부터 무시되었고, 새로운 직무대행체제를 구성하여 원직복직과 단체협상을 요구하는 투쟁이 연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교통사고로 입원중이던 위원장이 복귀하여 또다시 임 단협을 직권조인으로 마무리하자 조합원들은 당연히 이에 항의했고, 직권조인은 또다시 무시되었다.

위원장이 임단협을 직권조인하고 튀어버린 상황에서 현중노조 대의원대회는 조선사업부 부위원장 이원건을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고 12월12일부로 128일 투쟁의 첫 출발인 전면총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위원장 사퇴(투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노조사무실로 복귀한 위원장은 사퇴압력을 받았고 사퇴서를 썼으나 강제적 분위기에서 썼다는 이유로 사퇴를 공식 부정했다)와 파업지도부에서 진행된 공장을 점거한 파업투쟁은 1.8 테러사건, 2.21 식칼테러사건, 대규모 상경결사대 투쟁을 겪으면서 발전해갔다.

128일 파업투쟁은 1989년 3월30일 ‘아침이슬’이라는 작전명으로 명명된 공권력 진압작전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가두에서 투쟁을 이어가다가 파업지도부 위원장이 경찰에 출두하던 4월10일경 마무리 되었다.

이원건 파업지도부 위원장의 구속과 법정 투쟁은 다음해 골리앗투쟁의 발단이 된다.

3. 1990년 골리앗투쟁

현중노조 홈페이지 노조연혁은 1990년 주요일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월20일 5대 이영현 집행부 출범
2월7일 전조합원 집단조퇴(공판 참석차)
2월9일 구속자 석방 투쟁으로 취임식도 못하고 이영현 위원장 구속
4월11일 단체협상 상견례(사측 불참)
4월25일 골리앗 총파업(임.단협 성실교섭 요구와 노동운동 탄압중지 요구)
4월28일 공권력 투입(1만5000명) 육,해,공 상륙작전 개시
4월30일 동구지역 가두투쟁 펼침
5월10일 골리앗 농성 해제
9월11일 임금협상 합의

현대중공업 1990년 투쟁이 골리앗투쟁으로 명명된 것은 공장을 점거한 파업투쟁 기간보다 82미터 높이의 대형 크레인으로 상징되는 골리앗크레인 농성이 길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공회대 사이버NGO자료관 ‘민주화운동 주요사건’에서는 현중 골리앗 투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탄생 배경에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87년 7월21일 노조가 결성될 때부터 회사가 먼저 어용노조를 설립함에 따라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장기간의 투쟁 끝에 노조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88년 6월부터 시작된 단체협상 과정에서 제임스리 테러사건, 식칼 테러사건 등 상식 이하의 탄압을 받아가며 88년 12월부터 89년 3월30일까지 무려 128일간의 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현대그룹과 공권력은 1990년 임투를 앞두고 치밀한 계획 아래 현대중공업노조 지도부에 대한 선제 공세를 취했다. 즉 1990년 2월9일 검찰은 이영현 위원장을 구속시키고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을 수배조치하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현대중공업노조는 즉각적인 쟁의 여부를 둘러싼 논란 끝에 대의원대회에서 84 대 116으로 쟁의발생 결의가 부결됨으로써 보다 신중한 대응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권용목과 윤재건에 이어 4월20일 수배중이던 우기하 수석부위원장마저 구속되자 4월21일 조선사업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에 4월22일 소집된 대의원대회에서는 현 상황을 총체적인 노동자 탄압으로 간주하여 4월25일 전면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리고 4월25일 총파업과 동시에 이갑용 사무국장을 총책임자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회사는 4월27일 이사회의 결의로 경찰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였고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4월28일을 공권력 투입 날짜로 잡고 울산 전역에 전경과 백골단 1만2000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89년 투쟁 과정을 통해 공권력에 의해 좌절을 맛보아야 했던 노동조합에서는 공권력 투입시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계속 투쟁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4월26일 밤부터 골리앗 점거농성 결사조 78명을 82미터 높이의 골리앗으로 올려보내 농성 준비를 하였다.

<사건 내용>

1990년 4월28일 새벽 3시45분 경찰은 이른바 '미포만 작전'을 개시하였다. 현대중공업을 향해 경찰 대병력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경찰병력에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지게차로 쇳덩이를 옮겨 경찰의 현대중공업 진입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4월28일 오전 6시 정각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73개 중대 1만여명의 경찰병력이 불도저를 앞세워 현대중공업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선무방송을 하고 바다에서는 군함을 통해 미포만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이에 저항하던 노동자들은 대량 연행당했지만 골리앗 결사대 78명은 골리앗을 점거한 채 투쟁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골리앗 농성자들은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자신들의 요구를 밝혔다. "새벽과 한밤중에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무력진압에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와 우리의 비애에 울분을 느끼고 급기야 투신하려는 동지들을 서로가 감싸안으며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저 밑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노조가 유린되고 정부에 의해 천대받는 현실에서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러한 현대중공업에 대한 강경 진압과 골리앗 농성은 울산지역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감정을 자극시키면서 연일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5월3일까지 가두시위 관련 연행자가 730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규모 가두시위가 계속되었다. 또한 전국적 차원에서는 전노협 총파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5월3일 골리앗에서는 물이 바닥나고 생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면서 버텨나갔고 마침내 5월6일부터 전원 단식에 돌입하였다. 농성이 시작된 후 9일 동안 한번도 대화를 시도하지 않던 회사측과 5월7일 한차례 대화가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그 후 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황에서 버티던 농성대오는 농성 13일만인 5월10일 오후 2시30분 '현중노조가'를 부르며 골리앗에서 내려와 전원 연행됨으로써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사건 특성>

노태우 정권은 1988년 말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개시하였다. 즉 지도부 사전구속영장 청구와 그 집행을 명분으로 한 적극적인 공권력 투입이라는 물리적 방식을 통해 노동자의 투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무시한 공권력에 맞서 싸운 대표적 사건이다.

<참고문헌>

전노협, <전노협백서> 2권 174~192쪽

월간 <말>, 1990년6월호 골리앗크레인 노동자 투쟁기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1988년과 달리 1990년 골리앗투쟁의 시작은 자본과 정권의 탄압 공세로부터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초 부산고등법원은 88~89년 128일 파업투쟁의 영웅으로 불리웠던 이원건 파업지도부 위원장의 항소심 공판에서 1심 선고보다 높은 형량을 언도했다. 현중노조는 5대 임원 위원장 당선자 신분으로 대의원 간담회를 진행하여 검찰에 대한 항의행동으로 전조합원이 월차를 내고 법원 선고공판에 참여할 것을 결의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회사측은 당연히 불법집단행동으로 업무가 방해되었다며 고소고발했고, 위원장, 수석부위원장 등 임원 당선자들이 수배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2월9일 위원장의 구속에 이어 4월20일 우기하 수석부위원장까지 구속되면서 자본의 공세로부터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투쟁을 밀고나가야 할 지도부가 미적거리고 있다고 판단했던 조합원들은 지도부에 대한 불만과 수석부위원장 구속에 항의하는 현장조합원들의 작업거부 직접행동으로 나타났고 이는 지도부의 파업일정을 앞당기게 했다.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까지 구속된 상황에서 현중 지도부는 비상대책위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고, 비대위 위원장 선임과정에서 부위원장들 모두가 고사하거나 비대위위원장을 맡았다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며 비대위 지도부 구성에 난항을 겪었다. 여기서 당시 비대위 위원장을 맡았던 이갑용 동지의 말을 들어보자.

1989년 현대중공업에서 파업 투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위원장과 부위원장들이 모두 도망가고 임원 중에 남은 사람은 사무국장인 나 혼자였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야 하는데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내가 그 총대를 멘다는 것은 곧 구속과 해고를 의미했다.

나는 왜 ‘골리앗’에 올랐던가.

또다시 이어질 지루한 복직 싸움과 그로 인해 겪을 어려움과 갈등을 생각하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위원장과 임원들이 모두 도망간 것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조합원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결국 ‘골리앗’에 올랐다. 그 골리앗 투쟁(1990년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 때 노조원 100여명이 82미터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 13일간 농성을 벌인 사건)의 대가로 나는 해고자가 되었다.

1990년, 80미터 상공의 골리앗 위에서 나는 외로웠다. 땅에서는 로마 병정처럼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잡아가고, 바다에는 대간첩 작전 때나 쓰일 것 같은 해군 함정이 노동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연신 농성을 중단하라는 방송을 틀어대며 헬기가 날고 있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노동자들은 무기력함과 외로움에 고통받아야 했다.-2004년9월14일 <한겨레21>


밀려서 올라간 골리앗 크레인 농성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들이 장기간 공장을 점거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128일간 공장을 점거당했던 자본가들의 ‘아픈’ 기억은 한 해를 넘기고 또 다시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점거 당하자 즉각적인 진압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4월25일 전면파업, 4월28일 공권력투입이 말해주듯이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기간은 단 3일에 불과했다.

당시 나는 5대 집행부의 문화체육부장으로 상집간부 역할을 맡게 되었고,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서는 골리앗 고공농성조로 편제되었다. 골리앗 고공농성은 공권력 투입시 가두에서 버틴다 하더라도 공장이 가동되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과 골리앗을 점거했을 때 공장 가동이 쉽지 않을 것이며 진압 또한 쉽지 않을 것이므로 후퇴 전술로서 골리앗 고공농성이 기획된 것이었다.

전면파업 돌입 하루가 지나자 기자들을 통해서 공권력 투입설이 나돌았다. 4월28일 미포만 작전이 진행된다는 정보였던 것 같다. 우리는 전날 밤 미리 예정된 골리앗으로 올라가 있었다. 고공농성장 골리앗 상공에는 농성자들이 버틸만한 식량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4월28일 새벽 ‘미포만 작전’으로 명명된 진압 작전으로 두번째 육해공 공권력 투입이 시작되었다.

대형 건설장비로 바리게이트를 제거하고 페퍼포그를 쏘며 전경대가 밀고 들어온 현장은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기와 불꽃으로 아수라장이 된 듯해 보였다.

많은 동지들이 진압과정에서 후퇴하면서 다치고 연행되었고, 또한 많은 동지들이 골리앗 고공으로 올라왔다.

골리앗 고공농성과 전국적 연대총파업

1990년 4월28일 현대자동차 노동자 동지들은 현대중공업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현대자동차 정문 앞 길을 막고 경찰 차량 진행을 저지하는 투쟁으로 연대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차량이 화재로 전소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골리앗 고공농성투쟁은 5월1일 101주년 노동절을 기해 전노협 전국총파업으로 엄호되었다. 그리고 골리앗 투쟁은 역사적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그 의미는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초기라는 점과 전국적 조직이 건설되고 있었던 점, 시기적으로는 아직 군사독재정권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점 등 정세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투쟁에 대공장이 앞장 서 있었던 점으로 인해 역사적 의의를 두고 있는 듯하다.

고공농성장에서 갖은 고초를 감내하며 악전고투하는 동지들에게 힘을!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 투쟁의 상징이었던 골리앗투쟁의 현장 고공에서 당시 비대위 의장은 “내 명령 없이 작업장에서 망치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본과 공권력에 선언했다. 우리가 내려올 때까지 작업장에서 망치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쌍용자동차 동지들과 비교하면 참으로 행복했던 투쟁이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공농성장에서 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전국 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이었고 해당 사업장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었다.

지난 2008년12월24일부터 2009년1월23일까지 만 1개월간 그 혹한의 조건에서 100미터 상공 굴뚝 위에서 악전고투하다 살아 내려온 울산 미포투쟁의 두 동지를 기억하며 쌍용자동차 굴뚝 위의 동지들이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당시 울산 미포투쟁 굴뚝 위의 한 동지는 악전고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투쟁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유서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1월17일 영남노동자대회에 온 노동자 동지들이 추운 겨울 사측이 쏘아대는 소화전 물벼락 속에서도 먹을거리와 덮을거리를 굴뚝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고 우리는 두 동지가 살아서 내려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 골리앗 투쟁의 영웅성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투쟁을 엄호하고, 연대했던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쌍용차 자본과 공권력은 투쟁중인 쌍용차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자본과 정권을 협박하고 있는가? 금속노조의 총파업인가? 그것이 협박은 되긴 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볼 때 전혀 협박되고 있지 못하다. 현대자동차노조의 돌연한 지도부 사퇴와 공백상태, 민주노총의 결의와 결단의 부재. 하부단위 노조들의 무기력함과 아직도 만연한 기업별주의는 계급적 연대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다. 20년 전 현중 골리앗 투쟁에 연대하던 그 힘과 결의와 열정이 필요하다.

덧붙임
조돈희 님은 현대중공업 해고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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