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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14 20:46
전노협의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박창수 열사
 글쓴이 : 노동자
조회 : 1,526  

1960년 부산 부평동에서 태어난 열사는 유별나지도 않았고 착했으며 남 속일 줄 모르던 아이로 부모님께 기억되고 있다. 부산기계공고 시절 첫 직장인 (주)진양기계에 다녔으나 1년여 만에 부도가 나서 스테인레스 회사를 거쳐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근무조건이 열악하고 산재사고가 빈발한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박창수 열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용하게 웃는 인사성 밝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6년 2월 어용노조에 대항하는 ‘양심회’라는 소모임을 운영하던 동지들이 대의원으로 진출했다가 그해 7월 해고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박창수 열사는 8월에 현장 식당을 지어줄 것을 요구하며 4일간의 중식 거부 투쟁에 선두에 선다. 그 결과 식당 건립과 추석 상여금 100% 추가 지급을 약속받았다. 그후부터 해고자들과 소모임을 구성하였고, 현장 동료들에게 해고자들의 뜻을 전하는 파발마의 역할을 하였다. 1987년 7월 25일 노조위원장 직선제가 관철되고, 직선제로 선출된 집행부에서 회계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열사는 1990년 7월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고,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2월 9일 발족한 대기업 연대회의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각종 노동현안에 대한 공동투쟁과 노태우 정권에 의해 실시된 인사?경영권에 관한 노동부 지침 철회,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 노동악법 개정,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 확보 등을 위해 투쟁하였다.

1991년 2월 11일 경기도 의정부 다락원에서 열린 대기업연대회의 모임에 참여하여 대우조선노조 투쟁에 대한 지원을 논의하고 나오다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구속 수감 중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5월 6일 04시 45분에 안양병원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5월 4일 갑자기 머리를 크게 다쳐 입원한 박창수 열사의 죽음은 의혹투성이 상태에서 백골단을 동원하여 시신을 강탈한 권력에 의해 강제 부검되었고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의 창립에 강경 탄압으로 일관한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현장 간부들의 전노협 탈퇴 및 대기업연대회의 탈퇴 공작을 전개하였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군이 전투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서울구치소의 시국사범들이 5월 1일 단식투쟁에 돌입하였으며, 박창수 열사도 이 단식에 동참하였다. 이에 정권은 급기야 전노협 탈퇴 협박을 거부하고 투쟁하던 박창수 열사를 죽이고야 만 것이다.

박창수 열사는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에 모셔져 있다.

유족으로는 부 황지익, 모 김정자, 처 박기선, 아들 용찬, 딸 예란이 있다.